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립 마운트배튼 (문단 편집) == 평가 == 워낙 복잡한 시대를 살아왔는지라 보는 시각과 기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연이은 실언과 기행들에서 보듯 인격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 국민들이 필립에게 붙인 별명이 '웃기는 사람(funny man)'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은 인종주의나 신분의식 등 1920년대에 태어난 꽉 막힌 상류층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필립은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 [[호엔촐레른 가문|독일 황실]]과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황실]]처럼 영국 왕실과 격이 비슷하거나 더 높다고 볼 수도 있는 왕실도 있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이 아예 퇴위하거나 권력을 잃고 몰락했다. 이런 난리통 속에서도 영국 왕실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대영제국 시절보다 국력은 낮아졌을지언정 현재 존재하는 왕실 중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실의 공주(The Princess),[* Princess란 작위 앞에 The가 붙는다는 건 왕자의 딸(왕의 친손녀/종친)이 아닌 왕의 적녀라는 뜻이다. 왕자의 딸도 Princess 작위와 HRH(전하) 칭호는 가지고 있으나, 앞에 The를 붙이지 않고 부친의 영지 이름을 따서 'Princess of~ (~의 공녀)'라는 작위로 불린다. 이는 왕세자(Prince of Wales)의 딸도 마찬가지다. 사실 Princess니 뜻만 놓고 번안하자면 왕녀나 공주라고 봐야 맞겠지만, 한국에선 왕의 딸과 왕자의 딸이라는 서열 구분을 하기 위해 공식적인 작위는 공녀라고 번안한다. 이는 대공의 딸도 같다.(ex.[[헤센의 알릭스]])] 그것도 차기 여왕인 왕세녀에 준하는 공주였던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혼인으로 과소평가된 감이 있으나, 원래 최상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으로 엄연한 상류층 출신이다.[* 망명생활을 하던 어린시절은 어디까지나 왕족, 그것도 고위왕족이라는 기준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이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누나들이 전부 다 독일 왕공족들에게 시집가서 그렇지 신분으로만 따지면 여왕의 남편이 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오히려 일등 신랑감 수준으로, 이런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온지라 동년배 기준으로도 더 경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궁에서 귀한 공주로 자라면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어린시절을 보내며, 영국 특유의 [[레이디 퍼스트]] 성정을 지닌 영식들만 봐왔던 엘리자베스에게 필립은 신선한 충격과 설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나머지 자녀들과 달리 왕위 계승자인 장남 [[찰스 3세|찰스 왕세자]]에게는 엄했는지, 찰스는 엄격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든스턴(Gordonstoun)이란 [[스코틀랜드]] 시골 한가운데 있는 기숙학교[* 이 학교는 필립의 모교인데, 매우 억압적인 교칙으로 유명한 학교다. 필립은 아들들을 모두 이곳에 보냈다. 찰스는 이 시절을 "지옥이자 수용소 생활"이라 회고했고, 자신의 아들들은 전부 [[이튼 칼리지]]로 진학시켰다.]에 들어간 자신을 필립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무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필립과 찰스 모두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사이가 좋아졌다. 찰스는 자신이 애정을 덜 받았다고 인정하고 필립 공이 아버지로서는 별로, 할아버지로서는 최고라고 은근하지만 직접적으로 깠다. 가장 사랑했던 자식은 자녀들 중 하나뿐인 딸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앤 공주]]로 성격도 외모도 자신을 닮아서 유독 아꼈다고 한다.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안토니 리처드 루이|에드워드 왕자]]가 장래 군 복무를 조건으로 영국 해병대로부터 대학시절 등록금을 지원받았지만, 입대 후 계약 기간인 12개월 중 의무복무기간 3분의 1만 하고는 전역을 신청했을 때 집안에서 에드워드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버지 필립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와 누나 앤 공주는 "[[네가 선택한 해병대다|네가 선택한 길인데]]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않느냐"고 엄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필립 역시 해군 장교 출신인 데다 장남 찰스 왕세자도 대학 졸업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해 복무를 마쳤고, 차남 [[앤드루 앨버트 크리스티안 에드워드|앤드루 왕자]]도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군인이었다.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에게도 다정한 시아버지였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찰스의 불륜으로 고통을 호소해도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하는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고 방관하였던 반면, 시아버지 필립은 자신과 다이애나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서[* 당장 필립 공 자신도 혼인 초기에 몰락한 집안과 부모의 사정 등으로 멸시를 받은 적이 있어 사실상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며느리에게 연민을 느끼는건 당연했을 것이다.] 당시 왕실 인사 중에선 거의 유일한 다이애나의 우군으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슬픔을 달래주었다. 다이애나와는 특히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고 "너를 버리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에게 가려 하다니 찰스 저 자식이 도대체가 제정신이 아니다"고 다이애나의 편을 들기도 했다. 찰스에게도 "멍청한 놈, 바람은 바람이고 가정은 가정이지!"[* 현대의 일반인들 눈에는 둘을 따로 놓고 볼 수가 없지만 유럽 왕족 및 귀족들은 예로부터 [[정략결혼]]이 많아 배우자에게는 정치적인 의무를 다하고 연애는 [[내연녀]]와 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과거에는 그 부인에게 가짜 남편을 결혼시킨 뒤, 만약 왕이 자식을 낳을 경우 그 남편의 아들로 세례를 받게 하는 식으로. [[로얄 미스트리스]] 부분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필립 공도 찰스에게 가정에 대한 의무는 지키라고 꾸짖은 것.]라고 대신 욕해주기도 했다고. 다이애나 역시 왕실에서 고립된 자신을 신경써주는 필립 공에게 매우 고마워하여 편지에서도 그를 Dearest Pa라고 부르는 등, 사이가 좋았다.[* 다만 2002년 쯤에 다이애나의 심령 치료사라는 사람이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이후로는 필립 공이 "찰스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실이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그녀를 비판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주장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필립 공은 자신이 그 해당 편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심령치료사가 공개한 편지 양식과 서명이 모두 자신의 것과 다르다며 조작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또한 자신은 단 한번도 며느리에게 나쁜 말을 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는게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다이애나의 최측근이나 가족도 아니고 심령 치료사라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다 생전 다이애나와 인연도 없었다. 반면 필립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시아버지이고 국서 신분이다. 신분적으로나, 가정 내의 위치에서나 필립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손자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윌리엄]]과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해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 당시에도 손자들이 가엾다며 뒤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장례식 행렬에서도 내내 손자들을 신경썼으며 이후에도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썼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해리 왕자가 훗날 왕실이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여 아내 [[메건 마클|메건]]을 압박했다고 폭로했을 때도, 조부모인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범인이 아니라고 별도의 증언을 했다.] 또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 다들 어린 왕자들보다는 국장 순서와 진행사항에만 더 신경쓰자 "이 애들은 방금 어머니를 잃었다"며 일갈했으며, [[다이애나 스펜서|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례식에 빠지려는 윌리엄에게 "지금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거다. 할아버지랑 같이 가 보자꾸나(If you don't walk, I think you'll regret it later. If I walk, will you walk with me?)"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BBC]]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를 하도록 한 점이나, 당시 왕실 어른들 중 드물게 처제 [[마거릿 로즈|마거릿 공주]]가 이혼 경력이 있는 피터 타운샌드 [[영국 공군]] 대령과 결혼하는 것에도 찬성[* 결국 [[성공회]] 교회의 반대와 내각의 반대, 그리고 법률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 손자 해리 왕자가 이혼 경력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메건 마클]]과 교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둘을 지지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파격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면도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등 필립 공에 대해 다룬 매체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리스]]에서 쫓겨난 경험을 통해 "왕실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들이 왕실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왕실의 풍습과 법도에 대해 이런 개혁적인 면모를 가지게 됐다고. 이러한 시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필립 공은 조국에서 쫓겨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 왕실을 개혁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정말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면 외부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사고의 대부분이 구시대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 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개인으로서는 마음씨가 좋고 심성이 곧으며 나아지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격동의 사회 속에서 물의를 빚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